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공국 (문단 편집) === [[러시아 원정]] ===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원정을 나서게 되었고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부활과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인들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무려 10만 명 군대를 편성하여 60만에 이르는 나폴레옹의 대육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당대 공국의 인구가 300만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3%가 원정에 동원된 것이다.[* 참고로 현재 북한의 인구 대비 군인의 비율이 5% 정도. 이 10만 대군이 러시아로 떠난 후, 바르샤바는 허허벌판만이 남았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공국 내 거의 모든 인력을 다 끌어다 썼다.] 이 원정에 참가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나폴레옹에게 멱살잡혀서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를 보냈던 것과 달리, 폴란드에겐 '''조국의 재건'''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대육군의 좌익을 담당하게 된 폴란드 군대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싸웠다.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한 병력도 뮈라 휘하의 폴란드 창기병들이었으며 프랑스로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최후미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눈보라와 추위, 카자크 기병들의 습격등이 겹치면서 폴란드군의 피해는 제일 심했고 10만의 병력 중 살아 돌아온 인원은 단 26,000명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폴란드군은 러시아 침공에 동원된 대육군 소속 병력중 제일 많이 생환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바로 지척인데다 척박한 환경이란 것도 똑같아서 폴란드 병사들에게는 조금 더 힘들 뿐이었으나 따뜻한 남유럽과 서유럽 등지에서 징병된 다른나라 군대는 생환율이 10%를 밑돌았다.] 결국 1813년 1월 바르샤바 공국은 대부분 러시아에, 나머지 부분은 프로이센에 재점령되었다.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저항했고, 몇몇 요새는 1년 이상 버티기도 했지만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공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함으로써 사실상 공국은 이름만 남기고 멸망하였다.[* 이 당시 나폴레옹은 배신할 가능성이 높은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물자와 무기를 강제로 압수하여 사실상 군사력을 해체시켜 자신 휘하의 프랑스군에게 지급하였다. 하지만 바르샤바 공국에게서만은 압수하지 않았는데, 그만큼 나폴레옹도 폴란드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바르샤바 임시최고위원회를 창설하고 장군들을 통하여 영토를 통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